4월 16일에 쓴 글 편지



작년 내내 세월호를 피해다녔다. 정면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광화문 농성장에서 하는 집회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추운날 먼발치에서 보다가 따뜻한 음료수 8000원어치 정도를 사다가 서명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겨주고 도망치듯 걸어나온 적은 있다. 왜냐하면, 너무 힘들었다. 4월이 지나고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고 그러다 날이 추워지고 눈이 내리는데도 나는 여전히 너무 괴로웠고 아팠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겹다며 볼멘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설득 혹은 싸움, 다 너무 벅찼다.


4월 16일은 내 생일이다. 작년 그 날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수업자료를 프린트 하려고 총학생회실에 갔다. 시간이 남아서 인터넷 뉴스를 보는데 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이 침몰했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에 있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탄 배였다고 써 있었다. 이거 어떡하냐고, 그렇게 말했다가 이내 바로 밑에 다행스럽게도 전원 구조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아 이거 전원구조 됐대요, 괜찮대요 이렇게 말하고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이 끝났는데 전원구조 되었다는 건 오보였다고 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대부분이 그 가라앉는 거대한 배 안에 갇혀 있다고 했다. 실종자수로 표기되는 숫자가 너무 컸다. 그 하나하나가 사람인데, 너무 많았다. 제발 구조되어라, 무사히 나와라 빌던 안타까움이 하루를 가고 이틀을 가고 삼일을 갔다. 미대 학생회에서 모금을 했다. 많은 돈이 모였고 사용처를 알아보는데 작년에 프리츠커상을 받은 반 시게루의 기사가 바로 떠올랐다. 재난민들을 위한 임시보호소. 그런데 나는 이걸 이미 누가 제안했을 줄 알았다. 실종자 가족들이 체육관 조명을 받으면서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상황을 누군가는 안타깝게 여기고 이런걸 이미 제안했을거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에 반 시게루 아는 사람이 나 혼자인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관련 전공자가 몇이며 종사자가 몇인데, 전문가가 몇인데 교수가 몇인데, 누군가는 제안을 했겠지. 그렇게 전화를 했는데 그런 제안이 처음이란다. 실측을 위해 진도에 내려가기로 했다. 일요일 총운위에서 건의했고, 다음날인 월요일에 가기로 했다. ask.fm에 괜한 치기로 사람들을 상처주지 말라는 말이 올라왔다. 치기인지 환상인지 희망인지 아무튼 드디어 내가 뉴스 보고 우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진도로 가는 차에 올랐다.


당시 자율전공학부 회장이었던 현제가 네다섯시간을 운전한 고된 여정끝에 진도에 도착했다. TV에서만 보던 체육관이 보였다. 입구에서 어제 전화드렸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회다, 라고 했더니 담당자분이 진도군청 안전계장님에게 연락을 해주셨다. 진도군청으로 갔다. 재난 전문가도 아닌 촌구석 공무원 아저씨들이 갑자기 관할 지역에서 가라앉은 배 때문에 군청에서 일주일째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행정업무를 보았을 곳이 비상대책위실이 되어있었다. 가져간 자료를 보여주고 설명을 드렸다. 다들 사진을 보자마자 깊게 한숨을 쉬며 탄식을 했다. 우리가 이걸 진작에 했어야 되는데, 정말 좋은건데 너무 늦어버려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실종자 가족들만 찬성한다면 바로 설치를 진행하자고 말씀하셨다. 팽목항에도 임시 거처가 있었고 많은 가족들이 체육관보다 팽목항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라 상황을 보러 팽목항에도 갔다. 많이 힘들었다. 얼굴색이 다 죽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교복 입은 아이들 증명사진을 목에 걸고 다녔다. 눈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앞서 가는 공무원분들 뒷통수만 쳐다봤다. 가족들을 만나러 다시 체육관으로 갔다. 무대에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기자들이 몇가지 질문을 했다. 복도에서 기약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안좋아졌다. 유구가 여러구 올라왔다. 당시 가족대표였던 분의 자녀분도 그렇게 올라왔고 아주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차마 체육관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계단에 앉아있는데 무대 위에서 수습된 유구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비명 같은게 들리더니 부모님들이 뛰쳐나왔다. 확인을 위해 팽목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수가 없어서 주차장에 있는 차로 들어갔다. 가족들이 짐을 싸서 버스를 타러 나오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도저히 잊지 못하겠다. 엉엉 우는것도 아니고 악을 써서 소리 지르는 것도 아니고 기운이 다 빠져서 몸 어딘가에서 비통하게 흘러나오는 그 장탄식과 울음소리를 잊지를 못하겠다. 차 안에서 우리 일행 모두가 울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었다. 한참을 바닥에 주저 앉아 울던 가족들이 떠나고 나서 너무 힘들어서 엄마랑 통화를 잠깐 했다. 그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리고. 복도에 앉아 기다리는데 돗자리 위에서 깜박 잠이 든 나한테 울고 또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이거라도 덮고 있으라면서 베개랑 이불을 가져다준 가족분도 있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어렵겠다며 군청 직원분들이 마련해준 숙소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이 되고서야 겨우 실종자 가족 대표분들 회의하는 자리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는 내가 있으면 안될 자리였다. 얘기가 잘 전달이 안됐는지 가족분들이 그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단원고 실종자 학부모 대표분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우리 반은 겨우 열명 나왔어요, ㅇㅇ이 아버지 그거 감사할 일입니다 저희 반에서는 아직 한명도 못찾았어요, 아이들이 나올때는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 시간이 지나고 물이 빠지면 형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그러져요, 아이들이 외롭지 않게 반 친구들이랑 같이 안치하자고 그런 얘기가 오가는데 몇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그 자리에 살아서 숨쉬고 앉아있는게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을까. 그러다 대표분들 중에 한분이 나를 발견했다. 누구냐고 따지듯이 묻는데 거기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 겨우 더듬더듬 손에 든 자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데, 바로 잘라서 안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계속 울었다. 정부나 해경측에 전달할 얘기도 논의하는 자리여서 외부인에 민감했던 가족분들이 진정되고 나서도 계속 울었다. 한분이 오시더니 우리도 안다고, 이제까지 아무도 우릴 챙겨주지 않았다는걸 알고 이게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지만 너무 늦었고 우리는 여기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 말씀하셨다.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 하루를 꼬박 기다렸는데 한시간도 안되어서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이게 너무너무 아쉽다. 울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더라면, 내 옆에 설득에 능한 전문가 한 사람이라도 앉아있었더라면. 여기 더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체육관은 그 후로 몇달이 넘게 불이 켜져있었다. 그런걸 서울에서 볼 때 마다 너무 죄스러웠다. 목격자이면서, 해결을 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기력감이 심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 사건을 피해다녔다. 4월 16일을 피해다니고, 어디 나가서 싸우지 않고 혼자 울고 혼자 화내고 그랬다.


이틀전에 학교에서 세월호 문화제를 했다. 발언도 제대로 못했다. 마이크를 잡자마자 울어버렸다. 그 때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여기에 온건 이렇게 아직도 세월호 얘기를 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픈게 잘못된게 아니라는걸, 비정상이 아니라는걸, 이런 사람이 누구 하나라도 있다는걸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 수가 문화관 중강당을 가득 채울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나는 거기에서 힘을 얻고 왔다. 털듯이 이 글을 쓴다. 울지 않는건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울어도 우는걸로만 안끝내고 세월호 사건이 진정으로 마무리 지어질 수 있게 힘을 보탠다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집회에 가려고 한다.


덧글

  • 2015/05/28 02:17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 열아홉 2015/12/14 04:10 # 답글

    울컥,, 또 울컥... 계속 그러네요. 세월호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준것같아요
    그날 저도 티비를 보고 트위터를 보다 네이버를 보다 ..한참을 떠나지못하고 있었어요
    그리곤 구조 되겠지 로 생각했었는데..
    당신 아니고서야 그 고통을 제가 알수 있을까요.. 그저 아이들이 불쌍하고 유족들이 불쌍하고 그래요
    상상할수도 없는 슬픔일것이기에 감히 생각할수가 없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