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웃기.

그럭저럭 버틸만 하던 날씨가 갑자기 영하 8도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있었고 영하의 밤이 예보된 전 날 밤 거의 울면서 당장 조금 더 남쪽으로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를 찾아봤지만 수중에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베를린보다 더 나을 것도 없어보여서 포기했다. 대신 그 다음주 평일에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표가 싸게 떴길래 샀다. 날씨는 계속 좋지 않을 예정이었고 나는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처지였으니까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핑계가 필요했다. 베를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라는 말에 몸살 기운에 미열로 몽롱해진 몸을 끌고 만났던 취리히 보이 집에서 지내도 되냐고 물어봤고, 된다는 답장을 받자마자 신세 지는 처지에 염치도 없이 다섯밤을 묵는 계획을 세워 티켓을 샀다.

못생긴 도시와 구린 날씨가 싫어서 간 취리히는 내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회색인 도시였고 내가 머무는 6일 내내 흐리거나 비가 왔다. 도착한 첫날에는 하루 종일 침대 밖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장을 봐서 피자를 만들어 먹었다. 베지테리언이라던 그의 플랫메이트는 프로슈토가 올라간 피자를 세 조각이나 먹더니 다음 날 아침에 취리히 보이가 먹으려고 남겨둔 것까지 먹었다. 둘째날에는 입장료가 16스위스프랑이나 하는 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2018년에는 그것이 영화든 책이든 최대한 여성이 만든 것을 소비하자 라는 목표를 세웠는데 마침 너무 멋진 작품을 만드는 여성 작가의 특별전을 하고 있었다.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천천히 여유있게 관람했다. 미술관 카페에서 플랫 화이트와 레몬 파운드 케이크를 먹었다. 피자에 대한 복수로 저녁에는 그의 플랫메이트가 사둔 두부를 타이 칠리를 넣어 매콤하게 요리해서 갈릭라이스와 함께 먹었다. 그의 몫은 따로 남겨두긴 했다. 셋째날에는 그가 유년시절에 살던 빌이라는 도시에 갔다. 도착하고 잠시 쉬다가 하늘색 피아트를 타고 콘스탄츠에 갔다. 호수를 볼 계획이었는데 날씨가 흐려서 먹을 것만 사고 그냥 돌아왔다. 콘스탄츠로 가는 길에 날씨가 잠깐 개었고 그 덕에 스위스 같은 풍경을 조금 본 것으로 만족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는 아파트는 그가 유년시절에 만든 동물 모양의 도자기 인형이라던지 그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에게 주문했다는 도자기 촛대와 그릇 같은 것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저녁으로 소고기와 양파, 버섯을 볶은 것에 뽀모도로 소스와 생크림을 넣어서 납작한 면에 올려 먹었다. 자주 해먹던 것이라고 했다. 선반에 퐁듀 포크가 있어서 깔깔 웃으면서 이런식의 유치한 스테레오 타입을 만족시키는 작은 이벤트들이 너무 좋다는 얘기를 했다. 그 작은 도시에도 파티를 위한 베뉴가 있었고 취리히 보이는 그 날 열리는 파티에서 밤새 일을 할 예정이라 밥을 먹고 바로 떠났다. 나는 새벽 두시까지 쉬고 남은 파스타를 마저 먹고 아무도 없는 밤길을 10분 동안 걸어 파티에 갔다. 너무 많은 백인 헤테로 남자들과 알콜이 더러운 바닥에 고이면서 나는 냄새를 5시간 동안 힘들게 견디고 함께 귀가해 겨우 이만 닦고 잤다. 넷째날은 날씨가 맑았다. 테라스에서 만년설이 보였다. 동네를 잠깐 산책하고 다시 취리히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 중년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있었고 나는 엄마와 아빠 생각을 했다. 11월에 치과 치료 때문에 한국에서 머무는 일정이 길어진 것 때문에 나와 함께 독일을 여행하려고 비행기 티켓을 샀던 아빠가 날짜를 변경하지 못해서 결국은 혼자 여행을 하고 온 일이 있었다. 물론 아빠는 혼자서도 여행을 잘 다니는 타입이고 머리가 훌쩍 큰 나랑 같이 여행 했으면 비용도, 신경도 훨씬 더 많이 썼을게 뻔하지만 이 일을 나는 평생 마음에 두고 미안해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마트에서 어떤 치즈가 맛있고 어떤 고기가 맛있고 어떤 음료수가 맛있는지 다 아는데. 낯선 동네에 가도 맛있는 식당을 찾아낼 자신이 있는데. 영어로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아빠가 큰 어려움 없이 맛있는 걸 먹고 길을 잃지 않으며 지루할 틈 없이 좋은 시간을 보냈을까. 그리고 엄마. 나는 좋은 곳을 볼때마다 엄마에게 미안해져, 취리히 보이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으나 그 사랑이 엄마의 삶을 일부분 희생해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아는 사람. 내가 가진 만큼의 기회를 충분히 가졌던 엄마를 둔 사람. 내가 평생을 살아도 절대 이해 하지 못할 것들을 마주할때 나는 부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다시 빙글빙글 돌아와, 엄마 아빠에게 미안해진다. 취리히로 돌아와 밥을 먹고 자고 그 다음날 떠났다. 취리히 보이는 공항까지 함께 가주었다.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빨래를 하고 푹 쉬고 뉘른베르크와 델프트에서, 그리고 한달만에 한국에서 돌아온 친구들과 벨카인에 갔다. 일요일 아침에 뉘른베르크 친구와 같이 내 방으로 돌아왔고 씻고 저녁으로 미떼에서 훠궈를 먹고 우울하다는 친구와 만나, 뉘른베르크 친구의 친구 집에서 다 같이 잤다. 그러고도 또 한 밤을 더 친구 집에서 잤다. 혼자 춥고 작은 내 방으로 돌아오기 싫어서 계속 나다닌 것 같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 좋아하는 바디 워시로 샤워를 하고 새로 산 코코넛향 바디 로션을 꼼꼼하게 바르고 잔 다음날, 날씨가 맑아서 4개월만에 처음으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고 스케쥴러를 펼치기 전 습관처럼 확인해 본 메일함에는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과 해 면접을 보게 되었다는 메일이 와 있었다. 그 날부터 계속 날씨가 맑다. 공원에서 네시간씩 누워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창문을 열어두고 지낸다. 오랜만에 기분 좋고 따뜻한 날들이 계속 된다. 

취리히 보이에게 너는 행복한 사람이니? 하고 물었고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그 애한테 감정의 디폴트가 행복이냐고 했더니 맞다고 했다. 감정의 디폴트가 행복이 아니면 뭔데? 물어보길래 나의 디폴트는 약간의 슬픔과 외로움 이라고 했다.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 가장 즐거웠던 날들을 보낸 곳을 떠나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자격들을 번호표를 받아가며 쟁취해가며 산다는 것은 외롭고 슬픈 일이다. 더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괴롭기 위해, 덜 슬프기 위해 산다는 것은 외롭고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빗자루로 바닥의 먼지를 살뜰하게 싹싹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처럼. 부지런하게 주섬주섬 좋은 일들을 그러모은다. 

딸기철

혼자 살게 된 이후로 딸기 꼭지의 흰 부분은 잘라내고 먹는다. 집에서는 그렇게 먹으면 핀잔을 들었다. 먹을거 아까운 줄을 모른다고. 그렇게 꼭지 부분을 잘라내고 딸기를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외할머니에게 이름이 불려본 기억이 없다. 오랫동안 아프셨다. 막내딸인 우리 엄마는 방문할 때마다 엄마 나 누군지 알겠어 물어봐야 했다. 9살-11... » 내용보기

Paris Is Burning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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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나는 쏟아지고 싶었으나언 수도처럼가난했단다  » 내용보기

2월 9일

50유로를 주고 중고 자전거를 샀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본 자전거 중에 가장 낡은 것이었다. 안장 겉 가죽이 터져서 안쪽의 스펀지가 흉측하게 드러나 있었다. 자전거를 S반에 싣고 집까지 가지고 오는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사람들이 다 내 자전거 안장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페달을 돌리면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인 뒷바퀴를 고치고, 고치는 ... » 내용보기